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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권위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요즘은 세상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가장, 리더의 권위가 옛날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권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권위(權威)는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만일 권위가 힘에서 나온다면 악명 높은 독재자들의 권위가 제일 높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대 독재자들이 존경받는 경우가 없었다는 것을 보면 권위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권위가 만일 재력(財力)에서 나온다면 소위 상위 1%라고 일컬어지는 세계 최고의 부자들이 존경받아야 할 텐데 세상을 보면 이 또한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불위(不爲)의 권력을 가진 제왕들이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필요로 했다는 것은 권위가 힘과 재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입증한다고 하겠는데 그렇다면 과연 그들이 의지했던 것처럼 권위는 힘(權力)과 부(富)가 아니라 신(神)으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신(神)은 어떻게 사람에게 권위를 주는 것일까요?
우리는 흔히 “제왕은 제왕으로써의 권위가 있어야 하고 벼슬아치들은 벼슬아치로써의 권위가 있어야 하며 회사의 경영인은 또 그만의 권위가 있어야 하고 사회생활에서 어른은 어른의 권위가 있어야 하며 가정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모로써의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권위는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권위주의적 발상의 상징 ‘다스리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말합니다. “백성을 다스린다”라고.
그런데 ‘다스린다’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그들은 ‘다스린다’라는 말의 뜻을 알고 있는 것일까요?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글자라는 훈민정음을 가진 우리조차 ‘다스리다’라는 말의 어원을 말하지 못합니다.
강단 어디에서도 ‘다스리다’라는 말의 정의를 들을 수 없고 우리 인문학 또한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합니다.
사전에는 ‘국가나 사회, 단체, 집안의 일을 보살펴 관리하고 통제하다’라고 그럴듯하게 풀이하지만 요약하면 ‘군림하여 통치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오랫동안 이런 식의 교육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다스리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에 우리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떠올리게 되고, 상대적 강자들은 자기가 지배자의 위치에 있다고 여길 것이고 상대적 약자들은 자기 자신이 피지배자라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다스리다’가 두 개의 서로 다른 힘의 불균형을 전제로 만들어진 용어처럼 이해되기 때문에 ‘다스리다’라는 말이 통용되는 한 자칭 지배자라고 여기는 이들의 피지배자들에 대한 억압 또한 당연시 될 것입니다.
권위와 관련해서 ‘다스리다’라는 말의 정확한 이해가 중요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권위는 곧 ‘다스림’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다스리다’의 어원 ‘다살리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접근이 어려워서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다스리다’는 너무나 평범한 우리말 ‘다살리다’에서 기원했습니다.
‘다살리다’는 ‘다 살리다’이며 ‘다살림’이며 ‘다 살림’입니다.
다 살리는 것이 ‘다스리다’의 본래의 뜻입니다.
‘다 살리다’라는 말의 이해가 어렵다면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살림살이’를 떠올려도 좋습니다.
‘살림살이’. ‘살림살이’는 또 무슨 말인가요?
말 그대로 나의 살아감이 너의 살아감이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살리는 행위’의 인식과 다짐의 표현이 ‘살림살이’입니다.
‘살림살이’는 우리 겨레의 독창적인 삶의 철학을 함축한 말인데,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야만에 찌들어 살다보니 그 뜻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불행은 우리의 뿌리가 되는 역사를 잃어버린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역사를 잃어버려 우리말의 기원을 찾을 수가 없게 되고 습관적으로 답습할 뿐 무슨 말인지 뜻을 모르고 지나는 것입니다.
일찍이 지구상에 자신의 삶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한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단언컨대 인류 역사상 자신의 삶의 목표와 가치를 ‘살림’에 둔 사람들은 우리 겨레를 제외하고는 유례를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류역사상 비교하기 어려운 특별한 삶의 철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 철학의 발현이 우리의 삶이고 삶의 축적이 우리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역사가 다른 종족의 역사와 다르게 취급되어야 하는 까닭이 이것입니다.
우리 삶의 철학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없다면 우리 역사는 변방의 보잘 것 없는 흔적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우리 삶의 철학을 보는 안목을 갖춘다면 우리 역사는 다른 차원의 삶의 흔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살림살이’에 대한 안목을 갖추어야 비로소 ‘권위’에 대한 우리 겨레의 정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존중하고 하늘의 권위를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하늘이 우리 모두를 ‘다 살림’리는 존재일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임금의 권위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도 임금이 하늘을 대신해서 백성을 ‘다 살림’리는 존재임을 믿기 때문이며 벼슬아치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도 그가 임금을 대신해서 백성들을 ‘다 살림’리는 존재일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임금이 그러해야한다고 생각한 것처럼 어른도 부모도 그리고 스스로도 하늘을 대신해서 다 살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겨레의 권위는 바로 이 ‘다 살림’에서 기원합니다.
빛나고 아름답고 당당한 권위는 다 ‘살림’에서 기원합니다.
다 살림이 뒷받침되지 못한 권위는 오만이며 방종입니다.
다 살림의 미래적 가치
‘다 살림’, ‘다 살리다’, ‘살림살이’는 우리 겨레와 인류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왜냐하면 이 용어들에 우리의 정체성이 담겨있으며 우리 정체성이야말로 인류의 정체성과 밀접한 관계에 있어 인류 미래의 기반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타의 종족들이 자신을 위해 침략과 약탈을 일삼을 때 우리는 황량한 들판의 선지자처럼 삶의 가치를 ‘다 살림’에 두고 이웃들에게 ‘다 살림’을 실천해온 특별한 종족입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다 살림’과 ‘살림살이’ 경험을 가진 독특한 종족입니다.
21세기 인류 역사에서 우리 겨레의 위상이 이러합니다.
혼돈 속에 방황하는 인류에게 ‘살림살이’ 경험을 가진 우리의 역할이 중요시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권위를 회복하지 않으면 인류의 권위와 자존감을 세울 수 없습니다.
그런 종족으로써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스스로 자문해야 합니다.
혼돈에 빠진 인류에게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다 살리다’, ‘살림살이’ 정신을 실천해온 배달겨레의 후예로써 이제 다살림이 인류 보편의 가치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우리가 다시 나서야 할 때입니다.
세상의 진정한 권위 회복을 위하여 우리 스스로의 자존을 위하여 ‘다 살림’, 살림살이에 나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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